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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후기

스폰빵 이용후기

작성자
가지나무
작성일
2023-06-21 18:21
조회
382
아이작의 체취가 아로마처럼 향긋하게 느껴졌다. 쭉 이대로 있고 싶을 만큼 포근한 감정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흥분되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스폰빵
본능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귀엽지…?”

루체는 아이작과 함께 같은 베개에 머리를 벤 채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미소가 튀어나온다.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이곳, 헤겔 마탑에서 아이작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루체는 가까이서 줄곧 지켜봤다. 그가 목표를 성취할 때마다 그녀는 제 일처럼 기뻐하곤 했다.

다만, 근본적인 의문점이 있었다. 그가 왜 그토록 열심히 노력하는지였다.

루체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작의 부단한 노력은 이름 없는 영웅, 바로 그릉이 자기 정체를 숨기는 연유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아이작이 그릉이라고, 루체는 줄곧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이작과 그릉 사이에는 어째서 힘의 차이가 나는 걸까.

단순히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아이작이 이토록 열심히 하는 건 영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문득 떠올랐던 가설은 ‘그릉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데 조건이 있다면?’이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고려해볼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경우 모순이 해결되니까.

가령 요정처럼 신비로운 힘을 하사할 수 있는 존재라면, 계약을 통해 조건부로 강해지는 특성을 선사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설령 요정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아이작의 조건부 능력은 무엇일까.

‘마족 한정… 최강….’

…생각하고 보니 이상했다. 무슨 그런 억지스러운 능력이 다 있겠나.

그릉은 누가 보더라도 미지의 존재.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 학생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입고 다니는 옷은 마법 위장복일 테니….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학생일 것이었다.

이번 공신제 사건까지, 루체는 아이작의 작전을 꿰차고 있었다.

항상 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도망쳐 왔던 그릉이라면, 시계탑 위에 서서 백룡으로 시선을 끄는 짓은 절대 안 할 테니까.

즉, 일부러 그런 거겠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그릉이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혜택을 볼 사람은, 역시 무녀와 직접 싸웠던 아이작뿐이었다.

학사는 아이작이 무녀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기절했기에 ‘그가 이름 없는 영웅이었으면 그렇게 됐을 리 없다’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루체는 작년 1학기에 벌어졌던 학기말 평가 사건 때부터 아이작이 그릉이라는 생각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릉의 손과 아이작 손이 비슷한 감촉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그녀 혼자뿐이니까.

그렇다면 그릉이 자기 정체를 숨겨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정체를 들키면 곤란한 일이 생겨서겠지.

만약 그릉의 힘이 조건부라는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그 이유는….

‘평소엔 약하니까, 정체를 들키면 위험해진다든가.’

정체를 들키면 해악을 끼칠 존재가 아카데미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의 근거는 ‘내통자’라는 존재.

그릉은 마족과의 내통자를 경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릉이 마족의 출현 장소와 출현 시기를 어떻게 사전에 알아내는 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애당초 루체가 생각한 건 모두 가설에 불과했으니, 여전히 그릉에 대한 건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확실한 건, 그릉은 눈앞에 있는 이 친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 루체에게 필요한 건 스모킹 건뿐이었다.

루체는 아이작의 뺨을 톡톡 두들겄다.

이러고 있으니, 그가 무척 사랑스럽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역시 자신이 이 남학생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만다.

“…하.”

이윽고 루체는 표정을 굳히며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이따금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다.

뭐가 어찌 됐든, 자신과 아이작은 어디까지나 친구 사이였다. 좋아하는 마음을 밝히더라도 그와의 관계가 연인으로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는, 마음을 밝히거나 들켰는데 아이작이 루체를 기피하게 되는 경우였다.

아이작은 단호한 구석이 있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악의적으로 이용할 사람이 아니니까.

유일하게 마음을 연 사람과 사이가 멀어진다면, 하물며 그 상대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면…. 루체는 상상만 해도 가슴속이 아리고 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다른 여자들이 눈에 밟혔다. 자신이 망설이는 틈에 도로시 같은 망할 년이 아이작을 데려간다면, 아마 자신은 속이 뒤틀리며 피눈물이 날 것이었다.

아이작이 쭉 자신만 바라봐주길 바랐다. 간혹 애완용 새를 키우듯 커다란 새장에 그를 가두어 자신만 바라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황홀한 상상마저 들고 만다.

하지만…, 그 상상대로 되어선 아이작과의 약속이 어긋나고 말 터.

루체는 왼손을 위로 뻗어 약지에 끼인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약속의 증표였다. 서로 원하는 걸 이루어서 함께 살아가자는, 아이작과 한 약속의 증표.

마치 프로포즈라도 받은 것 같았기에 루체는 반지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새장에 아이작을 가둔다는 유치한 상상은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낼 수밖에 없었다.

루체는 왼팔을 내리고 다시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아이작, 쭉 내 곁에 있어야 돼? 네가 날 떠나면…, 난 아마 망가질지도 몰라.”

루체는 속마음을 읊조렸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는 아이작이 있으니까. 그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게 돼버렸으니까.

이윽고.

돌연 아이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꺽꺽거렸다. 괴로워 보였다.

“아이작? 왜 그래?”

루체는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악몽을 꾸는 걸까.

평소에 단련한다고 수면 시간도 아끼는 애인데.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려는 때 악몽이 찾아오는 건 잔혹한 처사이지 않은가.

루체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아이작의 머리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말들을 속삭이며, 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이작, 괜찮아….

“…자?”

기억에서 벗어난 루체는 침대 쪽을 쳐다보았다. 목욕 가운 차림의 아이작은 금세 잠들어 버렸다.

루체는 피식 웃고는 찻잔을 책상에 두었다. 램프에 빛 가리개를 씌우자 방은 어둠으로 들어찼다. 오로지 창밖 달빛만이 내비칠 뿐이었다.

루체는 침대에 올라가 아이작 옆에 누우며 함께 이불을 덮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아이작이 눈에 보이자, 루체는 싱긋 미소지었다.

“잘 자, 아이작.”

스윽, 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체가 아이작을 껴안으며 이불이 뒤척이는 소리였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해볼까, 싶어서 루체는 아이작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드디어 루체는 몰려왔던 졸음에 마음 편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 * *

눈이 부셨다.

잠에서 깨자 밝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침이었다.

한동안 멍을 때릴 정도로 신기했다. 이토록 개운하게 잘 잔 건 무척 오랜만이었으니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루체가 나를 곰 인형처럼 껴안은 채 얕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내가 악몽을 못 꾸도록 안아준 채로 잠든 모양이었다.

‘예쁜 것.’

덕분에 잠을 편안히 잘 잔 듯했다.

루체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 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헤겔 마탑을 떠나는 날이었다.

씻고 옷을 차려 입은 뒤, 루체와 함께 헤겔 마탑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연구실에 들어섰다.

마법사 로브 차림의 아리아 릴리아스가 우릴 반겨 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탑주님!”

“지금부터 개별 면담을 진행할 것.”

“…예?”

다짜고짜 개별 면담은 뭐냐.

“아이작, 먼저 들어올 것.”

“아, 네.”

아리아는 출입구 반대편에 있는 문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개별 면담이기에 루체는 밖에서 대기하라고 아리아는 말했다.

연구실 안쪽 문을 열자 집무실이 나왔다. 아리아는 문을 닫고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개별 면담은 뭐 하는 거지? 피드백 같은 거 듣는 건가?

아리아는 서류가 올려진 책상으로 향했다. 그대로 의자에 앉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여느 때처럼 늘어진 눈매가 돋보였다.

“아이작.”

“네.”

“[빙뢰]를 그렇게 빨리 익힐 줄은 몰랐던 것. 나로선 더 가르칠 게 없음. 오히려 그 이상의 가르침은 네 재능에 걸림돌만 될 뿐.”

좋은 말로 운을 떼는 아리아.

훈훈한 마무리였나.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안경을 한번 들치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처음부터 마탑주님께선 큰 도움이 돼주셨습니다. 감사했어요. 전부 마탑주님 덕분….”

“뭐, 이런 건 시시한 빈말일 뿐.”

“예?”

“완전 방음이니 걱정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테니 귓구멍을 똑바로 열어둘 것.”

아침 바람에 커튼이 펄럭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리아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왜 정체를 숨기고 있는지 말해볼 것, 이름 없는 영웅.”